반핵동향

주말을 여는 책 |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 낮은 시각으로 본 ‘매뉴얼 사회’의 비극 박순철 칼럼니스트

[주말을 여는 책 |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 낮은 시각으로 본 ‘매뉴얼 사회’의 비극 박순철 칼럼니스트


이런 말이 있다. “산다는 것은 자신의 소설을 쓰는 일이다.” 스페인의 작가 우나무노의 말이다. 산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인 삶이 전부가 아니다. 개인의 삶에는 전기적(傳記的)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스토리가 있는 것이다.

우나무노를 전공한 이 책의 지은이 사사키 다카시 선생의 삶, 그 스토리. 2년 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그 스토리에는 극적인 요소가 더해진다. 패닉 속에서 사람들이 방사능 오염지역을 대거 탈출했을 때 71세의 노인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았다.

노인 블로거와 치매에 걸린 그 부인, 그 농성 이야기가 이 책이다. 필사적으로 사는 것 밖에는 모든 게 서툴다는 노인의 이야기다. 하지만 대재난이 닥치기 하루 전만 해도 사사키 선생의 블로그엔 그의 잔잔한 일상만이 담겨져 있었다. 부인의 병세에 대한 걱정, 딸의 이메일에 대한 답장, 100엔숍에서 사온 운동 기구의 사용법 같은 일상사들.

그러나 원전사고 후 그 평온한 일상의 세계는 허망하게 무너져버렸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20여km 떨어진 그의 집은 다행히 지진이나 쓰나미의 피해를 면했지만 주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인지대로 변했다. 피난행렬이 줄을 이으면서 그 일대는 ‘그야말로 죽음의 정적으로’ 둘러싸였다.

◆깨어있는 개인과 국가 간의 긴장= 그렇다면 노인은 왜 탈출러시에 끼기를 거부하였는가? 그는 걷는 것조차 힘든 치매 걸린 아내가 없었다면 자신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밝힌다. 장애를 가진 아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이상한 용기와 안정감을 늘 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내 때문에 그저 물리적인 운신의 폭이 제한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삶의 중심(重心)이 낮아지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와 같은 로앵글의 시점이 확보된다고 하면 될까.” 옮긴이의 각주를 보면 오즈 감독의 이른바 ‘다다미 쇼트’ 촬영기법은 카메라를 앉은 키 정도로 맞추고 롱테이크로 잡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낮은 중심과 긴 호흡의 세계.

사사키 선생이 이 책에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낮은 시각, ‘피해자의 눈높이‘에서의 직접 관찰이다. 텔레비전 뉴스 같은 건 사절이었다. 가령 현지에는 오지도 않는 작업복 차림의 고관, 도쿄전력 고위직 같은 사람의 화면 등장은 재난지대의 시각으로 보면 무의미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코미디였다. “너무 우스꽝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이처럼 누군가는 현장의 진실을 고집하는 낮은 대척점에 머물러야 권력이 주역인 높은 홍보 무대의 허구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무엇보다 깨어있는 한 개인과 거대한 국가 사이의 긴장이라는 주제 속에 전개되는 드라마로 이해된다. ‘노인과 레비아탄’의 드라마.

그런데 국가란 무엇인가? 지은이는 이를 3개의 레벨에서 파악한다.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법적 개념인 국가(state), 국민 또는 민족이라는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는 국민국가(nation), 그리고 선조의 영혼이 숨 쉬는 아름다운 대지와 거기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country)가 그것이다.

대재난을 겪으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령 국가는 원전사고 지점을 중심으로 30km 안과 밖을 칼 같이 나눴다. 그 구분의 절대성, 그 비인간적 경직성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라인의 저주’였다. “단지 목숨이 소중하다는 단세포적 사고에서 나온 정부 지시로, ‘이리 가! 저리 가!’라며 마치 고삐를 잡혀 끌려 다니는 소처럼 취급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저 많은 정치가나 공무원들.”

그것은 바로 ‘얼굴 없는 지점’의 비극이기도 했다. 사사키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라인을 긋지만 그 라인으로 운명이 결정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무시한 차가운 규정이 피와 살로 된 따뜻한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매뉴얼 사회’의 비극이 거기 있다.

◆대재난에서 얻은 ‘인간선언’의 교훈= 지은이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가치, 즉 자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알고 그것을 더욱 소중히 했다면, 현재의 일본에, 우리가 사랑하는 후쿠시마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 터무니없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대재난에서 얻은 교훈을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나라’는 일의적으로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고,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사람이 나라’라는 교훈, 그것이 큰 대가를 치러 얻은 ‘인간 선언’의 교훈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원전을 폐기해서 지금의 쾌적한 생활이 30% 정도 불편해져도 참을 수 있느냐는 협박 문구가 나돌던 기억이 있다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단정한다. “그 협박 문구에 바싹 움츠려든다면, 이번 대지진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고 해야 한다.”

사사키 선생은 이미 10년 전에 “원자력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이래, 인류는 늘 파멸의 위험에 노출되었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원자력의 조작, 그 유지·관리에 절대적인 안전성 따위는 도저히 무리인 이상, 시급히 봉인하는 방향으로 예지를 결집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는 ‘비핵 3원칙’ 같은 ‘비원전 3원칙’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일본이 장래에 절대 원전을 갖지 않고, 만들지 않고, 들여오지도 않겠다는 원칙이다.

압권은 이 대목이다. 그는 좁은 일본 열도에서 원전을 갖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사고가 나도 대륙이라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일본에는 도망갈 장소가 없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느껴라, 라는 소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한 분노한 노인의 경고다.

그러고 보니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 ‘꿈’이 생각난다. 그는 꿈속에서 원전이라는 악몽에 가위눌렸다. 원전이 폭발한 뒤 아비규환 속에서 누군가가 “일본은 작은 나라야 달아날 덴 없어”라고 외치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런데 일본이 너무 좁다면, 한국은? 원전은 그저 타인의 악몽일 따름인가?

돌베개/ 사사키 다카시 지음/  형진의 옮김/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