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핵동향

“반원전 풀뿌리운동, 경찰이 대놓고 사찰…웬만해선 못견뎌요”

경북 영덕에서 원전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농민 박혜령씨가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누하동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새로운 보수시대를 맞아 새로운 풀뿌리 진보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영덕 지역운동 이끄는 농민 박혜령

12월19일 선거 결과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지만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지역시민운동의 불모지대나 다름없는 보수적인 경북 영덕에서 반원전 운동을 펼치고 있는 농민 박혜령(44)씨도 그중 한명이다.

지난달 27일 70여개 반원전 단체의 연합체인 ‘핵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 회의 참석차 서울에 올라온 길에 <한겨레> 기자와 만난 그는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70%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선거 결과는 새로운 보수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만큼 지역민들의 삶 속에서 뿌리내리는 새로운 풀뿌리 진보운동이 필요하다는 게 박씨의 주장이다. 보수적인 지역의 지역운동가가 보기에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은 원전 문제에 대해서 많이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세몰이에 급급했다는 결론이다.

대학(이화여대 법대) 시절 학생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뒤 1996년 결혼하면서 남편과 함께 귀농해 농사짓던 그는 영덕이 새 원전 건립 후보지로 거론되던 2010년부터 ‘영덕 핵발전소 유치 백지화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원전 반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2011년 3월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참사는 평범한 시골 농사꾼을 반원전 투사로 변모시켰다. 박씨는 지난해 4·11 총선에서 핵발전소 건립 폐기 운동의 일환으로 녹색당 후보로 출마해서 시민운동 무풍지대인 지역의 냉소를 뚫고 2.93%의 적지 않은 표를 얻기도 했다.

박씨의 대선 경험과 평가는, 특정 지역의 반원전 운동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제한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지역민의 삶 속에 뿌리내린 ‘생활정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진보정치를 모색하는 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야기하는 진보적 풀뿌리 정치에는 영덕군 창수면 갈천2리 이장을 맡고 있는 남편과 함께 마을 부녀회장(2007~2009년)을 맡아 산골마을 사람들과 부대끼며 민주적 마을 운영을 이뤄내고, 고압적인 행정당국과 맞서 승리를 쟁취해본 경험이 깔려 있다. 2007년 동네 상수도가 고갈됐는데도 제대로 대응해주지 않는 군청에 맞서 모든 마을사람을 이끌고 군청에 몰려가 영덕군청이 생긴 이래 최대 규모의 주민시위를 반년 동안 이끌었다.

변홍철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은 박씨에 대해 “농민이고 여성이고, 핵발전소 후보 지역에서 오랫동안 풀뿌리 운동을 해왔다는 점에서 녹색당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인터뷰/ 김도형 기획위원 aip209@hani.co.kr

-지역에서 반원전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선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요?

“12월19일 투표일 이전에 60~70대가 많은 보수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정권교체가 힘들 수도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어요. 보수층의 상당한 결집이 있는 것으로 보여서 선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판단하고 있었어요. 탈핵운동 등 지역운동 하는 지역은 노령층이 많고 보수적인 지역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어요. 또한 지역 현안 문제와 선거를 분리해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았고요.”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가요?

“선거 때에 힘있는 권력자에게 줄을 서고 권력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적인 측면이 있었어요. 지역에서 사람들 만나보면 젊은 사람들도 그런 심리가 많았어요. 기층 민중인데도 권력자와 동일시하는 측면이죠. 부조리한 사회의 피해자임에도 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현상이에요. 따라서 현안 문제와 정치·선거의 문제를 어떻게 일관되게 가게 만들 것이냐, 이를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이 생겼어요.”

-선거 결과에 담담한 것 같습니다.

“70% 정도는 예견했던 일이어서요. 투표일 오후 4시의 출구조사 시점에서 문재인 후보가 이겼다는 문자를 받고서 기대를 했지만…. 박근혜 후보 당선 충격보다는 새로운 구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새로운 보수의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해요. 5년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장기적인 고민에다 구체적 활동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봐요.”

-새로운 진보운동도 필요한 건가요?

“윤창중씨가 인수위 수석대변인으로 발표되기 전날 종편에 출연해서 ‘이번 선거 결과는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의 한판 대결이었다’고 발언하는 것을 봤는데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 폭력적인 내용이었지만 그 안에서 50~60대 보수층의 시각을 엿볼 수 있었어요. 그 사람들의 흐름과 논리를 좀더 면밀하게 분석·평가하고 진단해 꼬집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구꼴통이라고 단순하게 폄하할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것을 아우르는 것도 필요할 듯해요.”

-새로운 보수의 시대를 맞아서 지역활동가의 방향은?

“지역 대책위 활동을 하는 분들은 반핵운동보다는 지역운동의 일환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말고도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하세요. 지난해 4·11 총선에 출마하기 전에 주민들과 만나면서 ‘반핵운동, 핵발전소 반대 운동은 단지 에너지 문제나 원전 저지 운동이 아니라, 지역운동이고 농민운동이고 풀뿌리 운동으로서 다각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단기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총선을 하면서 그렇다는 것을 확신했어요. 2014년 지방선거를 대비해 녹색당에서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편과 귀농해 18년간 농사
2010년부터 원전 반대 투쟁
총선때 녹색당 후보 출마도

-문재인 후보 쪽의 원전 공약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문 후보 쪽에서 내놓은 원전 공약은 새누리당과 확실하게 차별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나 일정을 가지지 못했다고 봅니다. 원전 관련 공약으로 수명 연장 중단, 신고리 5~8호기 등 모든 신원전 계획 자체 백지화 등 공약을 발표하고 선거 일주일 전에 해당 지역 시민단체들과 정책협약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역 시민들과 정책과 공약으로 소통하고 이후 정권에서 이것이 반영되고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일정에 쫓겨서 지지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이전 정치 쪽에서 해왔던 조금은 일방적인 선거 문화, 행태들이 진행됐죠. 국민들의 정권교체 열망이 어느 때보다 고조됐음에도 불발된 것은 전체적인 선거 관련 문화가 제대로 사람들 마음에 다가가지 못한 측면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심지어 제가 활동하는 영덕의 경우 민주당에서는 원전 건설 백지화라는 플래카드조차 내걸기를 꺼렸을 정도니까요.”

-영덕과 함께 지난해 9월 새 원전 후보지로 지정된 삼척에서는 반원전을 내건 이광우씨가 대선날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시의원에 당선됐는데요.

“그분은 공무원노조 활동을 오래 해왔고, 그곳 출신이고요. 공무원노조가 탄탄한 지역이어서 지지층을 지역 안에서 확보해낸 것이죠. 저력을 갖춘 지역이죠.”

-영덕 상황은 어떤가요?

“삼척·영덕 지역에서 100만평의 원전 부지가 확정됐는데 그전에 자치단체에서 주민 동의 받을 때는 200만~300만평으로 받아 갔어요. 삼척에서는 이에 대한 분노가 대단했습니다. 삼척에서는 시장 소환과 원전 반대 진영의 시의원 당선으로 이어졌고요. 영덕의 경우는 부지에 포함되지 않은 4개 지역 주민들이 이주와 보상 대책을 요구하며 대책위를 만들었지만 전면적인 반대 대책위는 아니죠. 원전 수용을 전제로 한 반대운동인 셈이죠. 이곳 주민들은 100% 반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와 결합을 반대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우리는 그들을 배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도 이웃이고 피해를 받을 주민이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이 당신들의 결정으로 위험하게 될 수 있다’고 깨달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계속 설득하고 있어요.”

박혜령씨

“대선 결과 이곳선 예견했던 일
보수시대 5년으로 안끝날수도
새로운 진보운동 고민할 필요”

-원전 저지 활동은 어떻습니까?

“10~11명에서 늘어나지 않고 있어요. 4·11 총선 이후 꾸준히 새로운 지역대책위를 만들었다 흩어지는 과정이 4개월 동안 있었어요.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5㎞ 반경에 있는 주민들을 규합하기 위해 꾸준히 회의를 했지만 참여하겠다고 해놓고 불참해서 그다음 회의 때 다 깨지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어요. 관의 압력이 계속되고 있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9월14일 영덕과 삼척이 원전 후보지로서 지정고시가 발표됐어요. 하루이틀의 작업은 아니라고 각오하고 시작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어려워요. 하루 수십통씩 전화하고 한달에 전화요금이 30만원이 나올 정도였어요. 모임이 있기 전에 장문의 문자 보내고 넉달 동안 설득 작업을 했지만…. 다들 원전에 걱정하면서도 앞장서면 돌 맞는다는 반응이었어요. 밥줄과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찍히면 지역사회에서 퇴출된다는 공포가 있는 거죠. 그것을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어렵지만 찾아내서 꾸준하게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있던 자생적인 주민조직조차도 2005년 핵폐기장 반대투쟁 이후 관변단체 제외하고 한곳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만큼 행정기관의 견제가 많아요. 경찰에서 전화를 걸어와 내일 행사 있다는데 몇명 참가하느냐고 대놓고 사찰해요. 저하고 남편에게도요. 웬만한 사람들은 못 견디는 거죠. 주민들이 원전의 폐해나 지역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지역운동의 불모지에서 계속 싸우는 이유는?

“저는 아무리 부조리한 세력과 결탁한 사람을 봐도 연민의 감정이 큰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의 개개인 삶보다는 이런 삶으로 몰고가는 사회구조가 먼저다,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런 게 선거를 통해서 더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주위 사람들이 영덕을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활동하는 게 의미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크지 않고 숨어 있긴 하지만 풀뿌리 활동을 병행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서 여러가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리를 지킴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사람이 있고요, 이런 사람들이 소중합니다.”

“반핵·원전저지 운동을 넘어서
지역운동·농민운동으로 가야
사람들 조금씩 조금씩 다가와”

-원전의 위험성은 잘 알려져 있으나 많은 사람들은 대안이 있느냐고 이야기하는 게 현실입니다.

“지역 주민들도 ‘대안도 없는데 전기 쓰지 말자는 말이냐’고 반문하곤 합니다. 그러나 핵발전소는 대안을 생각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지구의 에너지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에너지는 유한한 것이에요. 인류를 포함해서 지구의 생명체가 몇 세대까지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사회 지성 집단들이 이 문제를 고민하고 보편적인 삶의 가치로 바꿔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계속적인 생산을 전제로 대안을 모색할 것이냐, 근본적인 삶의 문제로 풀어서 바꿔서 이야기할 것이냐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녹색당이 대통령 후보를 안 낸 것이 아쉽지 않았나요?

“객관적인 조건이 준비되지 않았고요. 내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총선 이후 (득표율 미달로 법적 해체를 당한) 녹색당이 10월13일 ‘녹색당 더하기’로 재창당되긴 했지만 재정적인 문제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후보를 내지 않은 것은 상당히 아쉬웠어요. 이번 선거판에 새로운 문제제기 집단으로서 녹색당 후보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지난 총선 때 표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녹색당 효과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상당히 많이 있었거든요.”

-다음 총선에서 녹색당으로 출마할 생각인가요?

“기존의 정치활동을 생각하고 녹색당으로 출마한 것은 아니에요. 제가 생각하는 정치의 상은 정치는 곧 생활이었어요. 삶 속에서 깊숙이 밀착해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지역에서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다음에 총선에 출마한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이르다고 봅니다.”

-귀농한 지 18년, 농사짓는 삶이 만족스러운가요?

“농사가 좋아 귀농했어요. 7000평의 땅은 있지만 2000~3000평에 고추·담배 등의 농사를 지었어요. 앞으로 100% 자급자족하는 단작 중심의 농사를 하려고 합니다. 최소한의 화폐를 버는 농사는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생태적 농업을 하겠다는 몇가지 원칙을 만들어왔는데 시행착오를 18년 동안 해왔어요. 지금도 소출은 다른 사람에 비해 절반에서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앞으로도 가능하면 유기적 농업을 하려고 해요. 그동안 부분적으로 해왔거나 준비 부족으로 못했던 것을 저희 가족의 제2의 시대에는 하려고 부부가 토론하고 있어요.”

-원전에 대한 관심은 역시 후쿠시마 제1원전 참사 때부터인가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계기였죠. 방송을 보고 굉장히 충격받았어요. 사회 부조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개인적인 삶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람들과 단절돼서 시골에서 살아온 17~18년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당시 남편 등 3명으로 영덕 원전 후보지 반대운동을 시작할 즈음이었는데 방송을 보면서 굉장히 많이 울었어요. 끔찍하다, 걱정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결심을 하게 됐죠.”